'동동 구리무'에서 올레드TV까지…LG그룹, 도전과 혁신의 70년

입력 2017-01-04 20:27   수정 2017-01-05 10:55

치약·라디오·TV…디스플레이·2차전지…
'국내 1호' 70년 역사가 '글로벌 일등LG' 로

고 구인회 회장 '창고 창업'
럭키크림·치약 히트 여세 몰아…국내 최초 전자사 금성사 설립

럭키→럭키금성→LG로
구본무, 부회장 때 CI 변경 주도
LCD·2차전지 미래 먹거리 발굴
3억 매출 70년 만에 연 150조로



[ 주용석 기자 ] LG그룹이 5일 창립 70주년을 맞았다. 고(故) 구인회 창업회장이 LG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부산에서 설립한 게 1947년 1월5일이다.

설립 초기 화장품(럭키크림)과 치약(럭키치약) 등 생활용품을 만들어 팔던 LG는 현재 올레드 TV, 전기자동차 배터리, 디스플레이 등 첨단 제품을 제조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다. 창업 첫해 3억원(현재 화폐가치 기준)에 불과하던 매출은 현재 연간 150조원대로 커졌다. 임직원은 20명에서 22만2000명(국내 13만7000명, 해외 8만5000명)으로 늘었다.


LG는 1968년 락희, 1974년 럭키, 1983년 럭키금성에 이어 구본무 회장이 취임한 1995년 지금의 LG로 그룹 명칭을 바꿨다. 당시 LG는 ‘정도 경영’을 핵심 경영철학으로 선포했다.

LG의 정도 경영은 최근 ‘최순실 게이트’에서 빛을 발했다. 주요 그룹이 각종 의혹에 연루돼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과 달리 LG는 정치권 등에서 제기된 혐의가 거의 없다.

락희화학이 만든 첫 제품은 럭키크림이란 화장품이었다. 흔히 ‘동동구리무’로 불린 제품이다. 당시 행상들이 북을 두 번 친 뒤 크림의 일본식 발음인 ‘구리무’를 외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당시 럭키크림 생산공장은 고(故) 구인회 LG 창업주의 집(부산 서대신동)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창고에서 창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럭키크림이 인기를 끌면서 락희화학은 1952년 국내 최초로 플라스틱 사출기를 도입했다. 화장품 뚜껑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1954년 개발한 럭키치약은 치약의 대명사가 될 만큼 히트를 쳤다.

구인회 창업주는 여세를 몰아 1958년 10월 금성사(현 LG전자)를 설립했다. 국내 첫 전자회사다. 그는 그해 11월 첫 해외 출장을 떠났다. 유럽 전자업계를 둘러보는 게 목적이었다. 100일 가까이 이어진 글로벌 행보였다. 이후 금성사는 1959년 11월 첫 국산 라디오를 선보였다. 초기 시장 진입은 쉽지 않았다. 당시 라디오는 부유층의 전유물로 ‘외제’ 일색이었다. 금성사는 처음부터 막대한 적자를 냈다. 회사 설립 3년 만에 ‘문을 닫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반전의 기회는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1961년 군사정변으로 들어선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홍보 수단으로 라디오를 택했다. 정부 차원에서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펼쳐졌다. 이 덕분에 금성사는 기사회생했다.기회를 잡은 금성사는 이후 첫 국산 자동전화기(1961년), 첫 국산 냉장고(1965년), 첫 국산 흑백 TV(1966년), 첫 국산 컬러TV(1977년)를 쏟아내며 국내 가전업계의 강자 자리를 굳혔다.

구 창업주는 1967년엔 정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미국 칼텍스와 50 대 50 합작으로 호남정유(현 GS칼텍스)를 설립했다. 그룹의 외형이 갖춰지면서 구 창업주는 1968년 1월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그룹 명칭은 락희였다.

구인회 회장은 2년 뒤인 1970년 1월 구자경 회장(현 LG 명예회장)에게 그룹의 바통을 넘긴다. 1974년에는 그룹명이 럭키로 바뀐다. 럭키는 화학사업과 전자사업 외에 건설, 증권, 유통, 보험 등 서비스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1983년 그룹 명칭을 럭키금성으로 바꾸고 1987년에는 서울 여의도에 그룹 본사 빌딩(현 LG 트윈타워)을 지었다. 1990년에는 여천석유화학단지를 준공하며 국내 최초로 정유부터 유화제품까지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LG는 1995년 또 한 번 변신한다. 그룹 명칭을 럭키금성에서 지금의 LG로 바꿨다. 당시 그룹 안팎에선 ‘잘 알려진 이름을 뭣하러 바꾸느냐’는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당시 구본무 부회장은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기업 이미지(CI) 변경이 필수적이라며 밀어붙였다. 구 부회장은 그해 2월 3대 회장에 취임했다. 이듬해 3월27일 ‘정도(正道)경영’ ‘세계 초우량 LG’ 등을 핵심으로 하는 새 비전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LG는 그룹의 공식 창립기념일을 3월27일로 정했다.

구본무 회장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최대 시련을 맞았다. 정부 주도 빅딜 과정에서 막대한 돈을 투자해 키운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겨주게 됐기 때문이다. LG는 창립 60년 사사(社史)에서 “강압적 분위기에서 반도체 사업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구 회장은 대신 LCD(액정표시장치)에 승부를 걸었다. 14개월간의 협상 끝에 1999년 네덜란드 필립스로부터 16억달러의 외자를 유치하며 합작사인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를 세웠다. 필립스와의 합작은 2008년 끝났지만 LG는 LCD업계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LG의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2차전지 사업도 구 회장의 작품이다. 구 회장은 1992년 영국 출장 중 2차전지를 접하고 실무진에 “2차전지를 개발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수년간의 투자에도 성과가 없자 내부에서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회의론이 불거졌다. 그러나 구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LG화학의 전기차 배터리는 세계 1위 경쟁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구 회장은 통신시장에서도 후발주자 LG를 무시 못할 강자로 바꿔놨다. LG유플러스가 첨단 LTE 망을 조기 구축한 게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자, 화학, 통신은 LG의 3대 성장축이다. 구 회장 취임 당시 30조원이던 LG그룹 매출은 현재 150조원대로 늘었다. 그 사이 LS와 GS가 계열 분리됐지만 LG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다.

구 회장은 지배구조도 일찌감치 깔끔하게 정리했다. LG는 2003년 3월 국내 대기업 중 처음으로 순환출자를 정리하고 지주사 체제로 전환했다.

구 회장이 풀어야 할 숙제도 있다. 부진에 빠진 LG 스마트폰의 부활과 전기차 배터리 사업을 도약시키는 과제가 시급하다. 전기차 배터리는 중국이 세계 최대 시장이지만 중국 정부는 한국산 배터리를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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